지구에서 한아뿐, 이만큼 가까이 by 정세랑 기억에 남은 책

크리스마스를 앞두었던 이번주 (12월 18일주)는 정세랑 월드에 빠져 살았다. 먼저 읽고 싶었던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 내친김에 '지구에서 한아뿐'까지 읽었다. 이전 피프티피플을 읽고 나서 이 작가의 팬이 되어 한 권 한 권 읽어 나가고 있다.

내가 소설을 읽을 때는 마음이 불안정한 때다. 현실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이야기 속 세계로 도피하고 싶을 때, 나는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는다. 소설 속은 언제나 평화롭고, 밝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물론 우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도 있지만, 그런 소설은 또 그대로 몰입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을 잊고 기분전환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도 좋지만, 소설이 더 편한 자세로, 오래 즐길 수 있어서 좋다. 항상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도 있고...

'이만큼 가까이'와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으며 특히 즐거웠던 것은, 나와는 아주 다른 캐릭터의 마음을 생생히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와 매우 유사한 나이대의 여자들 - 그들은 언제나 내 주변에 있었고, 어렴풋이 그들의 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었지만, 언제나 매우 멀게 느껴지는 존재들이었다. 솔직히 잘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생각하면 괜히 위축되기도 하는 그런 특이한 감정이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정세랑씨의 소설을 쭉 읽으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이해하게 되면서 과거의 내가 좀 한심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때 나는 정말 동년배의 여자애들이 보았을 때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게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 더 속도를 줄이고, 조금만 더 지혜롭고 또 여유가 있었다면, 분명 더 좋은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만큼 가까이'와 '지구에서 한아뿐'은 매우 다른 소설이지만, 그 안을 관통하는 따듯하고 여성적인 정서는 매우 일관적이고 닮아있다. 나는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그 식물적이고 따듯하고 부드러운 공동체에 메인 멤버로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더 좋은 공동체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감수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은 이상향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폭력을 감당해야 하고, 경쟁에 참여해야 하고, 돈을 모으고, 고집을 피워야 할 것이다. 미친 사람과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싸워야 하고, 가끔은 자신이 싫어도 미친 사람이 되어야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정세랑의 소설은 이 점을 외면하지 않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삶은 계속해서 어려울 것이고,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조금씩 지쳐 갈 때, 그리고 희망을 잃어 갈 때, 정세랑의 소설은 큰 위안을 준다. 마치 한참 바쁜 시기에 겨우 겨우 찾아온 금요일 밤 11시 정도의 여유와 같다. "이제는 연락 해 올 사람이 없겠지.. 적어도 한 12시간 정도는..." 하는 짧지만 귀한 휴식 시간 같다.

'이만큼 가까이'는 파주에서 자란 내 또래들의 성장소설이다. 청소년기에서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이야기와, 첫사랑과 첫경험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청소년기에 겪었던 상처들을 성장하며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뜻밖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엄청난 폭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어떻게든 시간과 함께 그 사건들은 잊혀져 가지만, 그 사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끝없는 화학 작용과 함께 그 사람들을 바꾸어 나갈 뿐이다. 소설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다. 소설 속의 인물들 중 나와 닮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 사람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이는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아주 달콤한 사랑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매우 신선하고 또 굉장히 소녀적이다.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한국적이고 또 매우 서울적인 상상력이 자랑스럽고 신선하다. 다소 지나치게 낭만적인 면도 있고,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내겐 낯설었지만, 낯설어서 오히려 좋았다. 순수한 사랑 - 그것이 두 개체간의 사랑이든, 스타와 팬의 동지적 연대감과 한없는 충성스런 사랑이든 - 그런 것이 존재하고, 또 행복하게 꽃을 피우는 모습은 지친 나에게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이 책의 주인공 '한아'의 저탄소 생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코웃음 치고 넘어갔을텐데, 내 주변의 한 멋진 친구가 실제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환경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터라 더욱 진지하고 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단편적이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인식하는가. 스스로만 옳고 항상 다른 사람은 부정직하거나 게을러서, 혹은 멍청해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는다고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 물론 실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먼저 의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의 작가는 늘 새로워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작가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생활도, 글도 옛날 사람처럼 쓰면 오히려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시대에 뒤쳐질 뿐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정세랑 작가의 시도와 스타일은 정말 멋지고 새롭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작가는, 다른 예술가처럼 더 반짝반짝해져야 하고, 새로운 사상과 스타일을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행복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작가의 소명이 있다면 바로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덧글

  • 프레드 2017/12/29 22:10 # 답글

    선생님~ 허유진 편집자입니다. ㅎㅎ 오랜만에 선생님과 연락이 닿은 김에 오랜만에 문득 선생님의 블로그에도 찾아와봤습니다. 선생님의 리뷰 잘 읽고, (이렇게 성실하게 잘 쓰시는 거에 또 감탄, 감명받고!) 왠지 이글루스가 재밌어 보여 충동적으로 가입했습니다. ㅎㅎ 전 선생님처럼 멋진 블로그는 못 만들 것 같고, 그냥 나홀로 일기나 쓰게 될 것 같지만 ㅋ 종종 놀러올게요! (사실 이글루스 이용하는 지인을 선생님밖에 몰라요 ㅋ) 선생님 글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 그런데 요즘 시는 잘 안 쓰시나 봐요~
  • 빛에대하여 2017/12/30 01:17 #

    안녕하세요 편집자님!
    최근에는 감정이 메말라서 시는 많이 안쓰지만, 소설을 하나 써서 1월말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 여전히 책을 읽으면 서평을 쓰고는 있는데, 최근엔 바빠서 많이 빼먹었어요. 새해에는 더 부지런해지고, 외국어서평도 다시 재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 프레드 2017/12/30 15:04 # 답글

    와, 소설이요? 1월 말 출간이면 정말 '곧'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어떤 내용일지 굉장히 궁금해지네요~ 책 나오면 나중에 제목 알려주세요. 저도 찾아 읽을게요 ㅎㅎ
  • 빛에대하여 2018/07/15 17:52 #

    결국 해당 소설은 6/11 출간 되었네요 '깨지기 쉬운'을 찾아 보세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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